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르틴 루터 (문단 편집) === 아내 카테리나 === > 아내는 비텐베르크의 샛별입니다. 아침 일찍 새벽 4시에 일어나서 부지런히 일하고, 밭을 갈고, 가축을 먹이고, 거래하고, [[맥주]]를 만드는 등의 일을 합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Katharina-v-Bora-1526-1.jpg]] (루터의 아내 카테리나 폰 보라는 결혼 후 루터린(Lutherin)으로 개명했다.) 루터가 캐테라고 부른 카테리나는 스스로 [[수녀원]] 탈출(?!)을 결심할 정도로 매우 진취적인 여성이었다. 루터를 설득시켜서 결혼한 것도 캐테였다. 루터는 아내에게 불만이 있었는데, '''순종적이지 않은 것'''이 유감이었고, [[피그말리온|"내가 다시 결혼 한다면 돌로 순종적인 여인을 조각해서 결혼할 것이오"]]라고 할 정도였다. 아내 카테리나는 16살이나 연하인데도 사회적으로 대단한 거물인 루터를 별로 어려워하지 않았다. 일화로 1525년 결혼 시 면죄부 판매의 원흉이자 루터의 정적이나 다름없는 마인츠 대주교 알브레히트 추기경(1518년부터)이 20굴덴[* 현대 화폐가치로 억 단위의 상당한 거금이다.]의 축의금을 보내자, 루터는 적의 돈이라며 거절하고자 했으나 캐테는 주님의 선물이라 여기고 빚부터 갚자[* 루터는 벌이에 비해 워낙 씀씀이가 컸고 인심이 후해, 캐테와의 결혼 전까지 늘 경제적으로 쪼들렸고 빚이 많았다.]고 했고, 결국 첫 [[부부싸움]](?)에서부터 캐테가 이겼다. 하지만 그럼에도 루터는 아내를 사랑했다고 한다. 열정적으로 사랑에 빠져 결혼한 것은 아니라고 인정했지만, "[[프랑스 왕국|프랑스]]와 [[베네치아]]를 준다 해도 캐테와 바꾸지 않겠다"는 팔불출 드립도 쳤고, 공공연히 설교에서 "아내는 주군이고 나는 신하", "아내가 [[모세]]고 나는 [[아론]]"[* [[모세]]의 형이지만 동생은 [[이스라엘]]의 지도자였고 형 [[아론]]은 밑에서 대제사장을 한다. 누나 미리엄도 [[예언자]]로 모세보다 연상이었으나 아론과 함께 대들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은 일이 있다.]이라고 우스갯소리로 [[공처가]] 인증도 했다. 그리고 독립적이고 활동적인 아내에게 이런 편지도 남겼다. >캐테, 당신은 당신을 사랑하는 경건한 남편을 가졌소 당신은 여왕님이오. 그러니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지붕 꼭대기만 봐도 기뻐하는 당신의 남편에게 굴복하지 마시오. 루터는 작센 선제후로부터 이전에 몸 담았던 검은 수도원과 부속 토지를 제공받았고, 면세 혜택과 비텐베르크 대학교 교수직 봉급과 선제후국 교회의 설교자였기 때문에 많은 사례금[* 오늘날에도 [[목사]]의 수입은 [[월급]]이 아니라 목회 활동에 대한 사례금이라고 표현한다.]이 있었다. 보통은 금전이 아니라 농산물 같은 현물로 받았다고 한다. 출판업자나 선제후나 귀족들에게는 귀금속 등을 선물로 받았는데, 당시 풍속은 금전으로 주는 건 천박해서라고. 영화 <아마데우스>를 봐도 [[모차르트]]의 쌈짓돈은 소싯적 왕실에서 하사받은 담뱃갑 모양의 금덩이. 하지만 루터의 집에는 6명의 자녀들과 캐테의 과부 숙모까지 모여 살았고, 고아가 된 루터의 조카 6명까지 맡아 길렀으며, 그에 따라 대식구를 부양하기 위해 유모, 집사, 하녀, 가정교사, 마부, 돼지치기, 식모, 머슴 등을 직접 고용하여 부렸고, 추종자[* 대부분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조교들]들도 20명에서 많게는 30명이 눌러앉아 살았다. 때문에 루터가 버는 수입보다 거의 2배는 지출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루터의 명성을 보고 찾아오는 손님들도 많았기에, 이런 손님들이 오면 당연히 융숭한 대접을 해야 했고, 떠날 때도 한보따리 싸서 노잣돈을 챙겨줘야 했다. 기본적으로 루터는 노랭이라 욕 듣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했기 때문에 늘 적자였다. 당연하게도 루터는 40년 동안 초반 생애를 학생과 [[수도자]]로 살았기 때문에, 금전개념이 없었으며 살림살이에 대해서도 완전히 무지했다. 그런데 루터도 행복한 의문을 가졌던 것처럼, 루터가 벌어들이는 돈보다 더 지출하면서 사는데도 경제적으로 부족하지 않았던 비결은, 아내 덕분이었다. 캐테는 루터가 세속 일에 대해 서툴렀기 때문에, 집안 살림은 물론 대가족을 먹여 살릴 사업까지 스스로 해야 했다. 카테리나는 선제후에게 '''[[맥주]]공장 허가를 받아서''' 맥주공장을 운영, 맥주를 생산, 판매했고, 품질이 좋아서 선제후 궁정에도 납품을 할 정도로 장사가 잘 되었다. 맥주뿐만 아니라 양조용 [[포도]] 농장도 운영했고 포도주 저장고까지 갖추었다고 한다. 농사도 농장을 사들여 크게 지었으며 [[소]], [[닭]], [[돼지]], [[양(동물)|양]], [[말(동물)|말]]도 기르고 [[오리]]들을 키우려고 연못까지 만들었다. 연못을 만든 김에 양어장까지 만들었다. 수도원에서 하숙하는 학생들에게는 소정의 하숙비도 받았다. 사업이 확장됨에 따라 루터의 집은 점점 커져 갔고, 루터의 집은 북적북적한 대가족 수준을 뛰어 넘어 50여 명이 살고, 일하는 공장이나 일터 수준이었다. 그래서 조용하고 검박한 [[수도원]] 생활에 익숙했던 루터는 이런 집 꼴에 매우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베네딕토회]] 수도원이었으면 어떨까?~~ 옛 수도원 부지를 하사해준 선제후에게 불평했는데, "다시 집을 얻는다면 이딴 돼지우리는 사양하겠다"고 루터는 사망 당시 많은 재산을 남겼고, 죽기 전 유언장에 직접 아내 카테리나를 단독 상속자로 지명했지만, 당시 풍습과 다른 일이었기 때문에 후견인들이 이러한 결정을 무시했다. 루터가 죽고 남긴 농장이 슈말칼덴 전쟁으로 초토화되자, 카테리나는 경제적으로 어려워졌다고 한다. 결국 남편 소생의 자식들과 함께 영지를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가던 중 폐렴에 걸려 53세로 세상을 떠났다. 시신은 자식들이 거두어서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